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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3-스무살의 연못
    창작/소설 2022. 7. 29. 03:02

    아침이었다.
    반 정도 걸쳐있는 창문으로 절반정도의 햇볕이 들어온다.

    “어후 씨… 어떻게 들어온거지..”

    연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핀다. 치킨집에서 싸 온 1L 짜리 페트병이 엎어져있다. 탄산이 날아간 맥주의 가장자리는 끈적한 잉크처럼 눌러 붙어있다.

    (맞다.. 치킨집에 갔었지…)

    동아리 뒷풀이는 언제나 신촌의 유명한 명소 크리스터 치킨이었다. 일년 더 나이를 먹은 선배들은 학교생활과 음악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 '2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중간고사 기간이 오기 전이야 말로 달려야 할 때다.' 라는 것도 선배들의 생각이었다.

    “휴학은 무슨 휴학이야 이 새끼야~ 시간이 약이야 그냥 학교 다니다 보면 다 잊혀져. 또 여자친구도 생기면 기억도 안난다 너?”

    가장 의지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선배였다. 응원을 해 준다며 굴다리 건너에 있는 그의 집으로 연호를 비롯한 후배들을 불러다 모았다. 무려 양주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술은 잘 못하는 연호였지만 ‘양주’ 하면 뭔가 좋고 비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주는대로 덥석덥석 받아 마신 술은 청록색의 아름답고 푸른 병에 들어있었는데, 비누같이 쓰고 독한 맛과 향이 났다. '이게 청춘의 맛인 건가?' 어른이 되는 길은 멀고 어렵다. 희미한 기억의 끝자리에 선배의 조언들이 생각이 난다.

    "사랑은 사람으로 잊는거야~
    내가 신입생이었을 때는 말이야..!
    여자친구가 나에게 엄청 집착을 했는데?
    야.. 진짜 너는 그런사람 만나면 안된다..
    남자는 자기를 이해해주는 여자를 만나야..."

    말소리가 멀어진다.

    바닥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분명히 듣고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천장이 마주보고 있는 지금이다. 술을 마시면 꼭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깬다는 것을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물… 아….. 다 마셨네…’

    머리맡에 생수통이 비어있다.

    지하 1층의 각 방을 차지하고 있는 하숙생들은 방문 밖의 긴 복도 끝 신발장 옆에 놓여있는 냉장고를 공유한다.

    연호의 동아리 총회는 목요일이고 금요일은 공강으로 비워뒀으니, 평소같으면 술이 깰때까지 더 자겠지만, 도저히 머리가 깨질것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잡힐 것도 없는 허공을 휘저어 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끄응...'
    (덜커덕)

    어둡고 짙은 갈색인 연호의 방문을 여는데는 독특한 요령이 필요했다. 방문 손잡이에는 싸구려 가짜 금장이 얼룩덜룩 떨어져 나가있다. 번들거리는 그러나 상처가 여기저기 가득한  손잡이를 악수하듯이 양 손으로 부여잡은 뒤 돌린 채로 살짝 들어 올리며 당겨야 열리는 양상이다.

    ‘아무리 하숙비가 싸지만… 문 좀 고쳐주지…’

    연호는 투덜대며 복도로 나선다.

    연호의 살같에 습기를 머금은 찬 공기가 핥듯이 혹은 할퀴듯이 지나간다. 여름이 다 가고 이제 좀 쌀쌀해 진 날씨지만, 아직 본가에서 간절기 옷을 가져오지 못한 연호였다. 한 손으로는 반팔 아래로 드러난 살을 부비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벽을 짚으며 냉장고로 다가간 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생수병 하나를 통째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치 물이 팔다리로 뻗어나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마치 식물이 된 것 같네.'

    삼다수 페트병의 뚜껑을 닫고 있던 자리에 덜커덩 꽂아 넣는데 연호의 눈에 야채칸에 쳐 박아 두었던 케잌이 보인다.

    ‘연호야~ 생일축하해~ 누나가 많이 사랑하는거 알지?’

    불과 3주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경해 누나는 세상에 있는 유일한 끈과 같은 존재였다. 직접 만든 케잌을 주며 축하해주던 그 때 드디어 말로만 듣던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베이스를 연주하면 너는 기타를 연주했음 좋겠어. 같이 밴드하면서 사랑도 하고 영화도 찍을거야. 꼭 영화 Once같지 않아?’

    영원할 것 같았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뜸해지고, 한 밤중에 그 전화를 받기 전 까지는..

    ‘나 지금 정동진 바닷가에 누워있어. 모래사장에 누워서 자고 갈 것 같아.’
    수화기 너머의 경해 누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지금? 내가 첫 차 타고 바로 갈테니깐 거기서 기다려!’

    연호는 허겁지겁 모니터 앞으로 달려든다. 버스는 새벽 네시 반 무렵부터 있으니 두시간 반만 더 버티면 첫차 시간이 된다. 고속터미널에 최대한 빨리 가며 누나를 만나면 될 일이다. 시커먼 밤을 넘어 짙푸른 남색의 시간을 걷는 연호의 발걸음은 비장했다.

    연호는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고, 푹푹 꺼지는 해변에 도달했다. 경해누나는 문자로는 계속 답을 하면서도 전화는 계속 받지 않는다. 연호는 저린 엄지로 다시 폰을 부여잡는다.

    ● 누나 도대체 어디야...?
    ○ ... 나 지금 정동진이야
    ● 내가 정동진 끝에서 끝까지 오갔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거야..?
    ○.....

    분명 파란 바다가 눈앞이었다. 그치만 연호는 사막의 끝과 끝을 계속 오갔다. 바닷 바람에 절어 얼굴엔 물때가 끼었다. 소금에 젖어서일까?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몸과 얼굴이 무거웠다.
    그 순간!
    경혜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지금 기분이 완전 좋아졌어! 고민이던 게 해결됐지 뭐야? 너도 이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 전화했어!"

    그제서야 연호는 자신이 누나가 찍는 영화의 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내가 니 장난감인 줄 알아?!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연호의 외침에 수화기 너머로 경해는 말이 없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 내가 기분이 나아졌다는데 그게 중요해? 너가 나를 사랑한다면 같이 기뻐해줘야하는거 아니야?"

    경해는 감히 화를 낸 연호 탓을 하며 헤어졌다.
    머지 않아 연호는 경해가 옛 연인이었던 연상의 의사와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듣게 되었다.

    그렇게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수제케잌이 생겼다. 안그래도 아픈 머리에 질식감까지 온 연호는 허겁지겁 냉장고 문을 닫았다. 명치 언저리가 너무 아려 마치 거대한 낚시바늘에 꿰인 것 같았다. 허겁지겁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돌아온다. 찬 바람이 백파처럼 그의 살같에서 부숴진다. 낡은 문을 들어 올리고 방문을 쾅 닫은 뒤 팀디로 크게 한 발을 내딛었는데,

    “앗! 차거…!!”

    맥주를 밟은 양말에 얼룩이 핀다.

    막 밴드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연호는 '깔끔한 독방에 기타와 맥주 전용 냉장고 그리고 간단한 운동 기구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일 것이다.'라고 생각 했다.

    분명 그 방은 연호에게 세상이 맞긴 했다. 곰팡이가 피었지만 그래도 햇볕이 반 쯤은 드는 방이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빠진 연어 처럼, 연호는 침대에 누워 다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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