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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수필)창작/관찰 (수필) 2022. 8. 20. 17:46
노화 (수필) – 220820
테크노에 취미를 갖게 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베이스와 킥이 단단한 딥하우스를 즐겨들은지는 꽤 되었다. 과한 신파가 묻어나지 않는 기계적인 반복음은 굉장히 인위적이면서도 그 규칙과 견고함이 자연을 닮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일을 하면서는 주로 멜로디가 절제된 딥하우스를 즐겨듣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이런 장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10대부터 20대 초반 무렵에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조금 몽글거리는 형태의 브릿락 또는 인디 락이었는데 요새도 듣게 되면 그때로 돌아가는 듯한 감성적인 느낌을 받는다. 당시에 특히 뷰렛이라는 밴드를 좋아했었는데 홍대에서 열리던 거의 모든 공연을 쫓아다녔다. 지금도 어둑한 지하의 습기와 반가운 얼굴들 그리고 먼발치에서 보이는 멤버들의 표정이 선명하다. 그 외에 곁들었던 노래는 Audioslave 같이 강하지만 그래도 감정이 녹아있는 하드락이었다. 이후 20대 초반이 되었을때는 RATM RHCP같이 튼튼하고 전투적인 노래들을 들었다. 막 대학에 들어온 나는 뭣도모르면서 체게바라를 동경했고, 아나키스트였으며, 집단이나 엘리트주의를 경계 또는 혐오했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 한참 밸리락/쌈싸페스티벌 등을 다니며 슬램존의 축 역할을 했다. 대학원에 가면서 즐겨 듣는 장르가 조금 바뀌었는데 그것이 시류때문이었는지 나의 취향이 바뀐 것인지는 명확히 모르겠다. 빅룸을 포함한 drop이 많은 신나고 빡센 카타르시스가 많은 파티음악이나 Daft punk나 bloody beetroots나 Justice와 같이 락과의 융합으로 독특한 파열음을 만들어내는 터프한 음악들을 좋아했다. 그때부터였을까 Deadmou5나 Armin van Buuren, Above and beyond같은 trance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고 30대가 된 이후에는 딥하우스 위주로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나름 명확한 음악 취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에 지니고 있는 감정적인 해소나 당면한 과제들과의 융화가 가장 큰 조건이라고 생각이 든다.
여하튼 그렇게 가지게 된 요새의 취향으로, 제대로 된 딥하우스와 테크노가 나오는 매니악한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태원을 간 적이 있다. 이태원에는 희한한 골목골목에도 술집과 클럽이 많은데 그 중 하나를 지나던 도중, 한때 예능인으로 활동했던 김C가 휴대용 사각 힙 플라스크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홀짝이며 굉장히 편안하고 나른한 자세로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는 취해있었을 수도 있다. 사실 그가 1박2일 은퇴를 선언하고 나서도 그를 본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합정에 있는 힙한 LP 라운지인 만평에서도 그가 LP로 디제잉을 하던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자유로워 보이던 그가 멋지다고 생각해 술을 여러잔 샀던 게 생각난다.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김씨는 한번도 연예인인 적이 없다. 그가 정말 오래전에 ‘뜨거운감자’ 보컬로 부른 ‘아이러니’라는 곡은 나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까지도 오랜 화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생각은 또 그대로이고 어른이 되면 이라고 했는데, 열 일곱과 서른 둘이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 같아 아파가고 꿈을꾸고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거라고”
어릴 때는 어른이 되었다거나 어른이 되라는 것이 상황과 의무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자 명분이고 권위의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커 가며 지혜와 너그러움은 갖더라도 천진함을 두르며 살아야겠다며, ‘내가 어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여러번 다짐해 왔다. 여전히 그 노래를 생각하거나 듣게 되면 가슴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든다. 하지만 내가 열일곱에 울컥이던 이유는 진심에 대한 충성과 다짐 그리고 찬양이었다면, 지금의 울컥함은 향수나 그리움 또는 나를 혹시라도 배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그리고 반가움 등일 것이다. 아티스트 혹은 자유로운 낭인으로서의 그와의 조우, 혹은 나의 달라진 음악 취향을 톺아보면서 여러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변했는가? 그리고 변화는 노화인 것일까? 나는 나를 배신했을까? 배신하지 않아야 하는 나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들을 안고서 서른 다섯의 나이에도 철없이 락페스티벌 3일권을 끊었다. 내가 받았던 소속감과 해방감을 더 이상 간직하지 못하고 있을까봐 내심 두려웠다. 정을 뗄 거라면 확실히 떼고 싶어서 무리해서 휴가를 내고 3일을 다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랜 친구들 혹은 그들을 이어가는 아티스트들을 만났고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다시 들끓는 마음 그리고 조금 더 빨리 지치는 몸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익스플레인: 뇌를 해설하다’ 중에 시즌 2 ‘청소년기 뇌의 비밀’ 에피소드를 보면 만 26세까지도 사람의 뇌는 여전히 완전한 어른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뇌의 회백질에 미엘린으로 구성된 백질이 태어나면서 후두부에서부터 진행되어 만 26세 전후로 전두엽까지 진행이 되는데 이 부분은 논리적 사고나 자제력을 담당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10대 혹은 20대 초반에는 ‘위험감수, 새로움추구, 또래관계’ 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또래들과 함께 있을때 격한 행동을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와는 별개로 대부분의 사람은 33세 이후로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지 않는다는 경향이 여러번 조사되고 보고된 바가 있다. 이것을 이미 형성된 취향의 견고화,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 또는 유관 호르몬의 감소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음악 취향의 변화는 뇌의 효율이 올라갔기 때문일 수도 있고, 초기 뇌 회로 형성을 촉진하기 위한 감정 호르몬의 폭발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살펴보면, 결국 지속가능한 자아를 위한 성장 과정이었기에 변화는 필수적이고 희귀하며 그래서 감정이 들끓던 나날들이 더 가치있을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케이, 그럼 변화는 노화가 아니라고 보겠다. 더 완성되고 지속가능한 나날들을 위한 부스트 업 같은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노화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지속가능한 나날들 혹은 ‘나’라는 것의 형체나 본질이 훼손되는 일련의 과정을 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신체 기관이 열화되어 목표한 기능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는 것이 생물학적인 노화의 정의가 아닐까. 작년 쯤에 ‘노화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고 리뷰를 작성한 적이 있다. 하버드 의대 소속인 David A. Sinclair는 효모를 연구하던 학자인데, 효모가 주변 상황에 맞게 유전자를 발현시키거나 끄는 것을 통해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단백질을 발견하고 이것과 유사한 단백질이 동물 및 인간의 신체에서 노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의 상세한 갈래 및 설명과 결론은 https://seowlite.tistory.com/m/51 에 작성한 바가 있어 깊이 다루지는 않겠다. 하지만 핵심은 결국 유전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작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을 복구하는 Sirtuin이라는 단백질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면 노화라는 거시적인 현상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실제로 효모 영양제로도 쓰이는 NAD+가 체내에 충분하고 추가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Sirtuin의 디아세틸화 작용이 원활해져서 고장난 유전자들의 절전을 충분히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디아세틸 작용에 대한 디테일은 책에 상세히 나와있지 않다. 추가 정보를 원한다면 Front. Physiol. 12, 755060 (2021) 등의 논문을 참고하는 것을 권장한다.) 결국 우리가 신체의 노화를 막기 위해서는 NAD+의 전구체인 니코틴 리보사이드나 NMN 등의 영양제 섭취 및 운동과 절식이 필요하겠다.
마음의 노화를 막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과학적인 방법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않다. 행복에 대한 깊은 탐구와 함께 생동감을 잃지 않는 것이 마음의 노화를 막는 것이 아닐까?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일상에 생존밖에 남지 않은 삶에는 존귀함이 없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생존 뿐 아니라 그 너머의 것,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나 더 나은 가치들을 탐구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생동감있게 하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커피와 술을 마시고 이야기 하며, 좋은 글을 읽고 쓰는 일. 사회적 물리적 한계를 타파하여 더 많은 정신의 해방을 야기하는 일 등.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의 노화를 막는 좋은 길이 아닐까 싶다.'창작 > 관찰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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