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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嬰兒) 220219 빛으로 내던져져 감각이 나팔처럼 쏟아진다 차갑고 따뜻한 옷들을 팔 다리에 걸며 이때는 좋았고 이때는 슬펐어 이름표를 하나하나 모아다 붙이는 일 뎃셍같은 스삭임 한가득에서 엄마의 입술을 읽는 일 찰방이는 수표면에 눈빛을 기울여 따르고 없던 기억들을 찾으며 일렁일 것을 상상하는 일
화가 20220126 우는 나무 안 춤엔 중력(重力) 렌즈 한 발이 있다 - 그런 생각을 왜 해? - 나고, 가는 방, 향 가늠쇠에 걸고 흐르던 것들 한 데 스치면 평평히 구긴 공간 일그러뜨린 곳 따라 속삭이는 점자가 돋아 탄흔 위로 아픈 너의 빛과 얼룩이 내리친다
체류(滯留) 220117 마음이 시간을 앞서 달거나 짠 사이에 긴 끈으로 땋은 침묵이 있다 미처 삼키지 못해 낮게 흐르는 종이 비행기 넘어져 푹 꺼질듯 부풀어 오른 공기 소금도 설탕도 아닌 하얀, 결정 당신은 환기가 필요해 티 스푼을 달그락거렸나 미지근한 활시위를 달리어 본다
무균지대 211219 열 두 방향에서 보며 쪼아대면 어느 모로 보나 입체적인 조각상이 된다 꾹꾹 담아 둔 것들 뱉지 못한 양치물에 입술이 파들대도 마음을 빠루로 뜯어낸 전서구 크레이터 가득한 기하이성질체 대가리 뿐인 토르소가 되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돌 돌다 땡! 하는 소리에 하루가 퍽! 하고 꺼진다 간신히 그려낸 한 붓 그리기 다행히 오늘도 나는 너에게 무해하였다
공릉 211215 큰 파충류의 등뼈를 따라 걷다 흙더미에 엉긴 나물을 후둘툴 털고 목구멍에 쑤신 채 달리 없이 우그적 댄다 들개 떼 같은 것들 뛰쳥이며 누렇고 마른것 칼칼히 일면 누구는 신이 나 여우라 누구는 흥이 나 뱀이라 하고 죽은 하루살이 떼 폴폴 날려 실눈 가에 주름은 상감된다 건조한 아가리 사 이 사 이 긴 터널 지나 낮게 잠긴 포자가 되어 뼈 보다 오랜 찰나를 다시 비틀어 쥔다
땅 2020. 12. 14 바다와 하늘을 다 돌아본 뒤 정갈히 얼다 따뜻한 마디 공평히 스미어 드디어 서로 닿다 땅 새로 돋아나는 땅 서로 태어나는
자습 201117 산 위 도서관에는 차게 개어놓은 공기들 틈틈으로 데운 숨에 뭉개뭉개 구름이 맺힌다 창틀에 걸터 드렁대는 햇살 모르는 이들이 고인 섬 한 가운데 홀로 입김 호호 불며 아직 답을 모르는 질문들을 뒤적인다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던 그 때 지금의 나를 본다면 나는 무어라 할까 그 곳이던 데에 와 구름 속을 헤집어 본다
노인과 바다 201101 텅 빈 배 하늘과 바다로 갈라진 세상의 경계에 내가 떠 간다 그것은 섬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물길에 흩어질 무렵이었다 바람길을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에 그만 잠이 들었던 나는 허기와 적막에 놀라 깨어났다 - 차라리 나는 거기서 나를 하늘과 바다로 갈랐어야 했다 - 섬에 대한 기억이었던 이제는 부패한 것들이 배 안에서 썩어갈 때 바다에서 난 섬에는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졌다
몰라일체 20200621-숭산스님과 나 더는 볼 게 없다던, 커다란 에고가 어깨를 파고들어도 작은 안주머니 속 생각 이전의 마음으로 비추어 본다면. 모른다는 빈 자리를 항상 열어두니 들바람이 불어 들고 아이들이 뛰논다.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십시오."
소금 20200607 지는 해 궤적은 선명한데, 새벽은 참 새벽같이 찾아온다. 소금기 핀 자국 따라 옷은 웅얼웅얼 물을 머금었다. 새벽이 참 새벽같이 와 나의 얼룩을 빼고 동네와 옛 날에 괸 물을 빼고 진 자리 아래 요철이 있는 그대로 핀다. 청개구리 꺼꾸락지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깨굴떼굴 구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