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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이어리에 침을 뱉는 일. 231218
    창작/관찰 (수필) 2023. 12. 18. 23:52

    겨울이 왔고 감기를 앓은지 열흘이 조금 안됐다. 코를 훌쩍이면서 올해를 마무리 해서 보내는데, 어영부영 닥친 일들만 간신히 넘겨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의무와 열망이 서로를 닮아가며, 의무는 다하고 싶어졌고 열망은 점점 숙제처럼 변해갔다. 열심히 헤엄쳤다고 생각했는데 어디가 수면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래가 새겨진 문진을 사서 책에 괴어 놓고 포스트잇을 다닥다닥 붙였다. 꼭 티벳 고원의 오색 룽타(風馬, 오방색으로 이뤄진 깃발)처럼 펄럭이는 그것들을 태계일주의 기안이 된 것 마냥 방바닥을 긁으며 멀뚱히 바라본다.

    올해 안에는 그간 쓴 글들을 묶어서 소규모로라도 펴 내겠다고 다짐했지만, 생각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신체 기관에 관한 수필들인데 마지막으로는 뇌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나는 보아뱀처럼 몇달이고 벽돌같은 석판을 삼키려한다. 1년전 독서토론에서, 도대체 이 책(에릭켄델-통찰의 시대)을 그 사람들은 어떻게 다 읽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1독을 했다고 해도 정말 모두 이해하고 소화한 것일까? 내가 부족한 것일 수 있다.) 다소 번역투의 어려움도 있지만, 그 어려움 너머에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사실을 단단히 그리고 아름답게 엮어낸 위대한 직조물에 가깝다. 약 620페이지의 정 가운데 쯤 도착했는데, 생각이 날 때마다 자리에 앉는 것으로는 작문은 커녕 조속한 시일 내의 일독 조차도 어려울 듯 싶다. 꼼꼼히 정리를 해 내는 사람이 아니어서 책상을 비워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과일가게 등에서 쓰는 운반상자 6호 (캠핑박스라는 이름으로 팔리기도 한다) 를 잔뜩 사서 자주 쓰지 않지만 버리긴 어려운 것들을 쌓아두었다. 절반이라도 온 데에는 이 덕이 크다.

    당장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을 물귀신 처럼 붙잡고 헤엄치다 깊이 잠수하니 되려 아가미가 돋는다.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듯 열심히 살아도 방향을 잡는 것은 핸들이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절박한 사람은 멋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제자리를 열심히 돌다가 넘어져서야 기울어진 것들을 서서 보았다. 스스로의 몸과 시간과 감정과 수요를 소중히 여기고 관리하자는 일종의 선언으로서, 자주 쓰지도 않을 것 같은 청량한 청록색 다이어리를 샀다. 1월이 되면 삭발을 하겠노라고 큰소리 친 김에 머리칼을 혼자 깎았는데 그 모양이 대강 마음에 들었다. 부탁받았던 노래의 작사를 드디어 마무리하고 전달한 뒤 잠드는 마음도 기뻤다. 옅은 감기의 열감처럼 나직히 들떠있었다.

    다이어리의 용도는 의무와는 독립적인 개인적인 목표와 프로젝트들에 한정짓기로 했다. 일터에서 쓰지도 읽지도 않을 다이어리를 주머니에 품고다니는 것이, 마치 흩어지는 개인적인 것들을 다시 모아줄 것 처럼 여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나 자신을 칼 곁의 꾸란으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반추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새로 만났고 떠나보냈고 잊고 잊혀지고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개인적이지만 나는 이것을 팔아 행복을 사기 위해 끝없는 환전과 번역의 책무를 느낀다. 자유롭고 외로운 점 하나가 여백과 자신의 명암을 구분하면서 요란히 소리칠 때, 등대의 할 일은 점을 선으로 그어내는 치환이고 연결이다. 해야할 일이 산적해있기에 나는 살아있는 한 시-점을 선언하는 시인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흠모했다.

    오늘은 해야 하는 일이 있어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홀로 남아 있다가 문득, 회사에서 작년 말에 나누어 준 다이어리에 펜을 꼽는 고무줄 같은 것이 있어, 새 다이어리에 애지중지 붙여놓고 기뻐하던 찰나, 크게 기침을 했고, 맑은 에메랄드 빛 커버 위에 얼룩이 졌다. 서둘러 박박 닦아냈지만 처음 같지 않아 '산 지 얼마 안됐는데 새로 살까?' 하다가 이내 객담과 다이어리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두어장 정도 서둘러 앓다가 잠들기로 했다. 

    후두부가 맑아지는 것 같은 청록색 시계와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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