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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옹 -주변을 채우는 것에 관하여- (230505)
    창작/관찰 (수필) 2023. 5. 6. 01:49

     

    갓 5월이 된 요즘, 날이 따뜻하다 또 서늘하기를 반복하는 덕에 나는 크게 앓았다. 양해를 구하며 약속을 취소한 뒤, 누워있다가 또 목이 부으면 앉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반쯤 죽어있다. 핸드폰 게임에 폰이 더워지고, 애매하게 새로운 영상들과 오래된 영화들도 지겨울 무렵, 창 밖엔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이렇게 방에 처박혀서 밖을 바라보는게 얼마만인지 나는 모른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다들 갇혀있으니까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다. 그 상황과 감정을 공유하며 시시덕 거렸기에, 홀로 겪는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달리. 공허할 무렵 내리는 비가 반갑다. 어디 나가려고 할 때는 그토록 거추장스럽던 비가 미스트에서 뿜어저 나오는 것처럼 입자가 곱고 상냥하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는 비를 참 좋아했다.

    왜 그렇게 비가 좋았는지를 생각해보면 내 주변의 광활한 공간을 채우는 것이 마치 가득 안기는 듯한 감각이 들어서였지 않을까 싶다. 평소에는 말이 없던 하늘 아래 각자 표류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나와 똑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제각각 다르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습기와 함께 내려앉은 옅은 감상을 공유하리라는 점이 좋았다. 온 세상에 안겨있는 그 기분이 좋다. 잘 데워진 빗줄기일 수록 그렇다. 그런 날은 녹음이 더 짙다. 바람이 호되게 부는 경우도 괜찮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떠밀리듯 서사의 한 가운데로 간다.

    나이가 들어감인지 세상이 서로 더 연결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모든 종목의 경기에서 형체가 불확실한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아간다. 시간이 남으면 읽어야 하는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는 등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며 교훈인 척 이 글을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다. 이 비가 그치고 목의 열감이 가라 앉고 나더라도 나는 여전히 쫓기는 꿈을 꿀 것을 안다. 여러가지 게임을 하지만 강제로 주어지는 유예의 시간에야 오랜 것들을 마주한다. 지금처럼 몸이 좋지 않아서 나가지 못하는 날이나, 막 방학을 마주한 대학생이라던가, 위스키 미니어처를 아무리 마셔도 잠이 오지 않는 장거리 비행 등이 그랬다. 당시 비행 중의 때가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시간은 아침과 새로운 오늘인데, 세상은 밤이고 어제였다.

    이런 애매한 감금 덕에 창가 너머로 내리는 비 그리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흙먼지 냄새를 발견한다. 어릴적의 우울감, 막연한 기대, 낙관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객관이라는 말이 이성적이라는 말과 동일시 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객관을 한자로 풀어서 보면 그냥 상관없는 사람의 시선 - 손님 객(客), 볼 관(觀) - 일 뿐이다. 누구나 적어도 1인분의 서사에는 주관을 가져야 한다. 객이 없어 지루하리라는 셈은 틀렸다. 적어도 나는 나를 본다. 타인의 시선은 막연하고 무심해서 시간에 금방 희석된다. 하지만 나라는 손님은, 당장은 몰려 부정할 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 그리고 선명히 꺼내 보게되는 성질이 있다. (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될 수 있는게 가장 많았지만 된 것은 하나도 없던, 감정에 충실했던 나의 20대는, 가장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가장 외로웠던 시기였기도 하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 우연히 대학가를 스쳐지나갈 때면 자동 재생되는 광고 처럼, 머물렀던 반지하 하숙집 또는 언덕위의 기숙사가 떠오른다. 곰팡이가 피어오르던 눅눅한 천장 아래 드물게 피는 아련한 기억들이 버거워, 성묘를 마치듯 과업으로 돌아온다.이런 탓에 나는 내 20대를 신촌에 많이 묻고 왔다. 무겁고 버거운 것 부터 지난하고 사소한 것 까지. 교정과 역전 외에도 기억들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

    신촌 근처의 대학인 연세대학교와 이화여대 사이에는 오르막길이 있는데, 그 길은 독립문 방면으로 갈 수 있는 금화터널로 이어진다. 금화터널은 안산(산의 이름이다)의 굵직한 한 자락을 관통하는 외길인데, 이 때문에 이 아래까지가 대학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신촌에서 금화터널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옆에는 공부하기에 좋은 큼직한 까페들이 몇 있고 (커피빈 등) 그 옆에는 빵집 두개가 나란히 신경전을 하는 듯 하다. 길 끄트머리 무렵에는 법대생들을 위한 기숙사인 법현학사가 있었는데, 나는 6년 반의 대학원 생활의 끝머리인 2019년을 이 곳에서 머물렀다. 이곳의 남은 호실들을 대학원생들에게도 허용하는 경우가 있던 덕이다. 기숙사는 안산에 둘러싸여 있어 조용하고 또 고독했다. 특히 어두운 날이면 인적이 드물었다.

    법현학사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어느날 밤, 눈이 쌓인 주변을 산책나온 골든리트리버 한 마리를 만난 기억이 있다. 녀석은 한겨울 밤 입김을 구름같이 뿜으며 내 팔을 핥았다. 당시 가죽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침이 잔뜩 묻었지만 상관없었다. 나 역시도 너무 반갑고 또 행복했기 때문이다 (구제에 방수여서였을수도 있다.). 주인에게 허락을 구한 뒤 나는 반쯤 주저앉아 강아지를 끌어 안았다. 그렇게 들소처럼 날뛰던 친구가 품에 안기더니 숨을 고르고 기대오는 감각과 체온이 감격스러웠다. 어쩌면 나도 전생에 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도 포옹의 상실과 존재는 내게 중대한 이슈다. '다정함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언급했듯이 '매일 포옹을 받은 사람들은 병에 걸릴 확률이 32퍼센트나 낮았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Psy. Sci. 26 (2015) 135-147) 감기에 아예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걸리더라도 회복 속도도 더 빨랐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 목이 부은 것도 포옹의 부재 탓일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발달심리학자인 존 볼비는 '인간은 모두 요람에서 무덤까지 애착 대상이 제공하는 안정 영역을 기반으로 여행하는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하다.' 고 했다고 한다.

    외로움은 나약하다고들 하지만, 발달의 역사는 유대를 기반으로 이루어 진다. 신생아와 산모의 맨살 접촉은 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서 조산아 사망률을 30%이상 감소시켰다고 한다. (Pediatrics 137 (2015) e20152238) 이런 스킨십을 캥거루 캐어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이의 심장박동수, 호흡, 산소포화도를 정상화하고 향후 더 잘 자고 침착하며 높은 IQ를 갖게 한다고 한다. 이토록 유대감은 생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실체가 없는 평판은 당장의 소음에 불과할 때가 많다. 진심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들에 뿌리내리고 포옹할 수 있는 삶이 되길 바란다.

    Postscripts: 이상적인 포옹시간은 6초에서 20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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