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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신 230609
    창작/관찰 (수필) 2023. 6. 9. 21:30

    문신

    230609 

    직장생활을 하며 깨달은 것은, "나의 사생활 속에서 사람을 새로이 깊게 알게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선이 분명하다기 보다는, "다 함께 성장해가던 미숙한 단체생활이 더이상 없으리라"는 점이 차이점이었을까. 와류에 휩쓸리며 밥알같이 익어가던 뜨거운 증기의 시대는 갔다. 각자의 삶은 중요했고 예절은 분명했고 사람들은 그 간격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다. 나 역시도 종종 그랬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만나지 않으면 된다. 애초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굳어진 각자의 동선을 구부려 교차로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토콜은 대개 안전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보는 데 있어 '확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적 고정관념에도 큰 문신을 한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 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확률이 매우 높지 않을 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됐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못한 버릇이라고 배워왔지만 서른이 넘어가면서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선한 노숙자가 있을 수 있다. 금권주의의 희생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마음을 아껴 LA의 텐트촌에 홀몸으로 가 봉사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범지대에서 반복되는 살인사건들도 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면 우리는 안전한 선택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지혜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수도 있다. 예외를 구분할 수 없게 하는 오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차 생각해왔지만, 모르는 상태를 인지하고 주지하는 것이 지혜다. 고정관념이 강화한 고정관념에 희생된 경우는 없을까? 모두가 범죄자 화류계는 아닐 것이다. 예외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가 예외를 모두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서부터 생각해보려한다.

    내가 문신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두번이 있는데, 한 번은 군 복무 중에, 또 다른 한 번은 학위 과정 중이었다. 그 각각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다.

    1. 한 입 베어문 선악과에서 이어지는 사슬이 선악과로 이어지는 그림 (2009)
    2. 김홍도의 씨름에서 넘어지는 사람의 어깨에 날개를 그린 그림 (2019)

    [2009] 지금과는 달리 내가 군생활을 하던 2009년에는 사병은 핸드폰을 소지할 수 없었다. 늙은이 티내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스마트폰도 보급화된 시기가 아니었다. 다들 세상과의 연결을 갈망했기에 인터넷 사용의 차례가 나에게 까지 오기엔 너무 멀었다. 나는 수첩에 생각을 정리하거나 보이는 것 들을 그리며 흩어지는 것 같던 내 인격을 더듬어봤다.

    세상에서 뜯어져 나온 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 꼭 조각의 단면을 맞추어 보는 것 처럼 느껴졌었다. 현상과 원인을 하나하나 이어가다보면 내가 온 곳이 어딘지 어떤 본질과 이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간절하게 닻을 내리고 싶던 마음은 다시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잊혀졌다. 당시 디자인했던 그림이 꼭 애플 로고같아서 그랬던 부분도 있다.


    [2019] 그로 부터 10년이 지날 무렵, 나는 다시 문신이 하고 싶어졌다. 순조롭지 못했던 박사과정 기간 속에서 무엇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지속적으로 수치를 주면서도 나에게 의존적이던 상사와 지내는 일에 짙은 질식감을 느꼈다. 당시 나를 견디게 했던 것은 생활요리와 운동 그리고 성당생활이었다.

    당시 나는 구약성서(창세기 32장)에 있던 야곱의 씨름 이야기에 큰 감화를 받았다. 거기서 야곱은 7년간 2번씩 (무려 석박통합과정을 두번이나 한 기간이다.)이나 지속된 노예생활 끝에 사랑을 이루고 그로부터 6년을 더 일한 끝에 독립한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인 야곱은 가나안으로 이동하던 길에 기도하다 천사를 만나 밤새 씨름을 한 끝에 이기고 이스라엘(하느님과 겨룬 자) 라는 이름을 받는다.

    나는 당시에 숨쉬 듯이 "야곱은 14년이었는데 나는 7년이니 무려 50% 세일이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내가 졸업하면 꼭 이 이야기를 날개뼈에 새기겠다고 결심했고 직접 그림도 그렸다. 하지만 막상 졸업이 결정되고 나니 그 시기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싶지 않아졌다. 손바닥 만한 문신을 하는데 50~100만원정도의 가격이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민화를 그리자니 옅은 선이 흩어지는 것이 걱정된다는 핑계도,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문신을 하는것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변명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1. 시간이 지나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 혹은 각오가 있거나 (각오)
    2. 고립감 혹은 답답함에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고 싶거나 (단절감, 의미)

     
    등이 나의 동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사람을 좋아하고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사회적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가 적을 수록 위의 동인들이 문신으로 드러나기 쉬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의 동기는 어떤 것일까?

    1. 단순한 아름다움 (재미, 관능)
    2. 사회적 인식에 반하거나 저항하는 대담함, 혹은 통증에 대한 내성의 과시 (저항, 과시)

    등이 있지 않을까?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동기들을 굳이 분류한다면 위의 2번에 해당할 것이다. 문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어서 작은 패션타투를 한 사람들이 낮은 연령대에서 많이 보이는 것도 긍/부정을 떠나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신을 할 때에는 피부에 상처를 내서 빠르게 교체되는 표피세포의 아래인 진피세포에 잉크를 주입시키는데, 여기에는 신경말단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고, 마취연고를 바른채로 문신을 하게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뿐 더러 피부 변형이 일어난다고 한다. 문신용 잉크는 물에 녹지 않는 무기물로 구성되어있으며 이에 들어있는 금속류가 알러지 반응(적색과 황색류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크롬이나 코발트 등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을 일으키거나 MRI 촬영 중에 가열되어 피부화상을 일으키는 등의 사고사례가 있다. 그러나 FDA는 문신용잉크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으며 의학적으로 안전한 잉크에 대해서는 합의된 바가 없다. (https://naver.me/52h60SbX)
     
    그렇다면 관계지향적인 사람들의 문신 동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1. 매우 사랑하는 무엇이 있거나 (사랑, 그리움)
    2. 자신의 한계를 미워하거나 (자기 혐오)
    3.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들거나 (자기 파괴)

    등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사랑했던 강아지나 부모님의 기일을 새긴 사람은 종종 보게 되는 것 같다. 매우 드물고 대개 후회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이니셜을 새기기도 한다. 어딘가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의 수 만큼 빈 칸을 만들어 두고 떠나가게 되면 그 기일로 빈 칸을 채우던 사람이 있었다. 맨 마지막 칸은 조금 달랐는데, 거기엔 자신이 죽으면 본인의 기일을 적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이야기가 충격적이면서도 담담해서 강한 인상이 남아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는데도말이다.

    자신의 나태함 혹은 나약함이 싫어서 문신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도박이나 범죄 중독에 '차카게 살자' 라며 스스로와 싸우는 초라한 중년도 있을 수 있다. 외모가 중요한 자신의 직업이 너무 싫어서 문신을 해서라도 업계를 떠나고 싶었다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마지막 소식으로는 소소한 행복으로 자기 삶을 단단히 직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골방에 깃드는 햇살로 뜨개질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결국 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대 조명 앞에서는 누구나 장님이 되니까.

    비정하게 차이고 그 절망감과 자기 혐오에 온몸을 타투로 도배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애초에 그런 꿈을 꿔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기존에 가지고 왔던 사회적 자아는 죽었다. 그것이 타살인지 자살인지는 알 수 없다. 싸이코 패스 성향의 사람들 조차 기생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의 절망감과 단절감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들을 갈무리 해 보면 사람들이 문신을 하는 이유는 포괄적으로

    1. 단순한 이유인 '관능, 재미, 과시',
    2. 추구의 목적인 '의미, 사랑, 그리움, 각오',
    3. 감정을 대상화하고 거리두기 위한 '단절감, 자기파괴와 혐오'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표면적인 결과 뿐 아니라 어떠한 시간을 거쳐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신을 하는 것은 마치 평생 같은 옷을 몸에 두르고 다니거나 혹은 단 하나의 곡을 평생 듣고 다니는 것과 같아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술가가 문신을 하는 것에 대해 큰 불편한 감정이 없다. 어차피 그 사람의 대표곡들과 장르는 대개 변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과 간섭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어 있음에도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자유도를 지켜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유대보다 표현이 우선이거나 유사한 가치일 수 밖에 없다. 타인과 다름은 희소성과 동시에 외로움을 낳는다. 문신은 스스로를 외롭고 자유롭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절된 곳에서 외부에 닿고자 하는 최선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몸에 새긴 것을 볼 때, 그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구절에 새긴 볼드체 정도로 여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정된 몸의 공간에 새겨넣을 수 있는 문신의 양에 한계가 있는 것 처럼, 한정된 시간 동안 내가 적을 수 있는 글의 양에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는 문신과 달리 북커버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육신과 함께 흩어지는 잉크와는 달리, 활자에는 시공간이 무한하다는 사실에 긴장감을 느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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